55. 성장 일기
me and my /


나에게 있어 소중한 어떤 존재가 앞으로 내가 사랑하게 될 나의 모든 연인을 영원히 갉아먹는다면 어떻게 할래? 숨겨도 보고, 거짓말도 해보고, 내 부끄럽고 잊고 싶은 인생 상황들을 전부 꺼내서 그 존재가 날 어떻게, 어떤 식으로 살려냈는지 설득시켜 보기도 하고. 모든 수를 다 써봐도 결국 내 연인은 그 슬픔과 구원에 대해 알 길이 없고, 또 그럴 필요도 없고, 내 옆에 남길 선택하는 대신 속앓이를 하느라 나에게 줘야 할 소중한 마음을 계속해서 좀먹게 된다면? 답은 당연하지만 두 개뿐이지. 그 존재를 지워버리거나,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 것. 난 5년동안이나 답을 알면서도 혼자가 아니어야겠다는 이기적인 이유 하나만으로 새로 나던 사랑에 자꾸 흠집을 냈어. 믿겨지니? 자그마치 5년이나 그랬다는 게?

근데 이상하게 올여름은 기분이 좀 많이 싱숭생숭했어. 평소랑 다를 건 없었는데 몸 안 쪽이 자주 답답하고 자주 눈물이 나고 그랬어. 계속 찝찝해하면서도 모른 척 하던 게, 내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던 게 자꾸 저녁 식탁의 접시 위에 가니쉬로 놓여있었어. 별로 관심도 없던 남자애가 내 인생을 스쳐가면서 조언이랍시고 한 소리를 했는데 그 말이 꼭 내가 아주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내 연인을 죽일 것만 같았던 거야. 같은 이유로 상처를 받았던 지난 연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공들여 쌓은 성이 작은 흠집만으로 무너지는 상상을 하면 아직 아무것도 짓지 않은 공터가 아프기까지 했어. 지금 돌이켜보면 그 아픔의 공감이 최초의 성장이었다고 생각해. 그래서 난 수십 번을 시뮬레이션했던 이별을 실행하기로 결심했지. 여름이 왜 가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게 만들고 그러잖아.

그건 사랑하는 남녀가 헤어지는 이별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서울이었던 커다란 공간과의 이별이었고, 걔네 엄마의 반찬과의 이별이었고, 온갖 고장난 기계를 고쳐주는 수리공과의 이별이었고, 전 연인이자 친구이자 은인이자 조언자를 동시에 잃는 이별이었어. 아무튼 걔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는 건 내가 이 도시에서 진짜로 한 번 홀로 서보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자 다신 없을 큰 도전이었는데, 어떻게 생각해? 어려웠을 것 같지? 힘들었을 것 같지? 근데 있잖아.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어. 웃기지. 걔가 내 인생에 들어와서 하던 일, 그거 그냥 다 내가 하면 되는 거였다? 알고는 있었지만 왜 그렇게 오랫동안 무서워했는지 몰라. 친구들이 벗어나라 벗어나라 할 땐 내가 어떻게 그러냐고 대답하곤 했는데 난 그저 어떤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. 물론 1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못 했을 거야. 부딪히기 직전이 원래 제일 무서운 거잖아.

지금은 못 읽겠지만 아마 앞으로도 안 읽겠지만, 인생에서 도려내놓고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미안하지만! 혹시나 언젠가 그 애가 이걸 읽게 된다면 내가 많이 슬플 때 밥 먹이고 살려낸 건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어. 아무것도 없을 때 같이 아무것도 없어준 것. 아무것도 모를 때 같이 아무것도 몰라준 것. 전부 고마워. 내게 제일 소중한 무아를 데려다 준 것도. 전부 몇번이고 말했지만 다짐처럼 남겨두고 싶어. 앞으로도 영원히 당장의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도 소주 한 잔에 군말 없이 내 인생에서 사라져준 것도 고맙습니다.

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은 시작부터 소중히 해야한다는 걸 알게 돼서 나에게 칭찬해주고 싶었어. 올해 한 일 중에 가장 타이밍 좋고 건설적인 일이었다고. 그리고 이걸 읽을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싶었어! 나 넘어지면 일으켜달라고!