59. 장르는 러브 코미디
me and my /


잊어버린 약속들은 날짜를 쓸 때만 잠깐 떠올랐다가 새벽과 함께 증발했다. 죽은 피아니스트의 씨디도 오래된 레코드의 노이즈도 나를 재우진 못했다. 받아온 수면제를 삼키면 앞으로 영원히 졸릴 것 같은 기분. 이 생각을 끝내지 않고 잠들면 빠져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.

내가 나의 블루를 꺼내 보여주기 전까진 나는 누군가에게 그냥 농담이고 싶다. 명랑하는 일에는 꽤 많은 체력이 소모되지만 딱히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. 하지만 누군가의 블루를 발견하게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. 아직도 스무살적 구원 서사에 빠져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안쓰러움이 제일 사랑같다. 저마다 새벽의 순백색 같은 슬픔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미운 사람도 덜 밉게 되는데 하물며 사랑스러운 사람은 어떨까.
내 기분에 딱맞는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났는데 어쩌면 내가 제일 많이 쓰는 말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. 나는 타인의 블루가 종종 내 것처럼 애틋하다.


키보드의 어떤 이니셜을 누를 때마다 아직도 내가 지난 몇 년간 매일 부르던 이름이 제일 먼저 자동 완성 된다. 이건 사랑과 같은 시스템이다. 나는 그 이름이 한칸씩 밀려나다가 결국 다른 단어로 덮어지는 걸, 시간이 그걸 해내는 걸 지켜볼 것이다.

한평생 내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을 때 J는 그게 자기인 것 같다고 했고 나 역시 그런가보다 하고 웃었었지만 보기 좋게 틀렸다. 나는 J가 너무 좋아서, 그에게 딱 맞는 퍼즐이 되고 싶어서 나를 자주 끼워맞췄다.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하는 것들을 하나 둘 깎았다. 어떤 밤에는 깎아낸 곳이 참을 수 없이 많이 아팠는데 아픔으로부터 도망치고 나서야 자유로울 수 있었고 우연히 들은 사랑 노래에 설렐 수 있었고 내 인생을 관통할 위대한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.

세상엔 내 장미의 건강하고 뾰족한 가시를 깎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를 알아봐줄 사람이 있다는 것.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것. 그리고 누군가의 퍼즐 조각이기 전에 누군가의 인생의 히로인이기 전에 나는 내 삶의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것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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